Welcome to our website (gisoopa + TRUST).

Dream the impossible, Do the impossible love, Fight with unwinnable enemy, Resist the unresistable pain, Catch the uncatchable star in the sky.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움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닿을 수 없는 저 밤하늘의 별을 따자.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중에서 -

혁신적 강의란?

혁신적 강의는 내 강좌를 세상에 공개함으로 시작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수업에 들끓도록 하자.

소통과 나눔의 무대

제1회 소나무. 소통으로 찾은 행복. 2012년 3월 23일

창의성

연결만 잘 시켜도, 창의적인 생각은 차고 넘친다.

생태계

기업을 살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게 하는 것

TRUST

TRUST = Tree Roots Using Social Technology. 울 연구실 로고다.

2014년 12월 7일 일요일

역린. 중용23장


작은일에 최선을 다하라

작은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변화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뀐다.

온정성을 다해 하나씩 변해 간다면
세상은 바뀐다.

중용 23

Do your almost even in trivial things,
From that, you can attain sincerity.

This sincerity becomes apparent.
From being manifest, it become brilliant.

Being brilliant, it affects others.
Affecting others, it changes them.

Changing people, it transforms everything.

It is only... those with almost sincerity... who can transform everything.

It will change.
If you do your almost, one by one...
The world will change.


중용 제22장(第二十二章)

惟天下至誠이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이면 則能盡人之性이요 能盡人之性이면 則能盡物之性이요 能盡物之性이면 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요 可以贊天地之化育이면 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그 성(性)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성(性)을 다할 것이요, 사람의 성(性)을 다하면 능히 물건의 성(性)을 다할 것이요, 물건의 성(性)을 다하면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울 것이요,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우면 천지(天地)와 더불어 참여(參與)하게 될 것이다.

 

天下至誠은 謂聖人之德之實이 天下莫能加也라 盡其性者는 德無不實이라 故로 無人欲之私하여 而天命之在我者를 察之由之하여 巨細精粗가 無毫髮之不盡也라 人物之性이 亦我之性이로되 但以所賦形氣不同而有異耳라 能盡之者는 謂知之無不明而處之無不當也라 贊은 猶助也라 與天地參은 謂與天地竝立而爲三也라 此는 自誠而明者之事也라


천하(天下)의 지성(至誠)은 성인(聖人)의 덕(德)의 성실함이 천하에 더할 수 없음을 이른다. 그 성(性)을 다한다는 것은 덕(德)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없어 자신에게 있는 천명(天命)을 살피고 행하여 크고 작음과 정(精)하고 거침이 털끝만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과 물건의 성(性)이 또한 나의 성(性)인데, 다만 부여받은 바의 형기(形氣)가 같지 않기 때문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능히 다한다는 것은 앎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함이 마땅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찬(贊)은 조(助)와 같다. 천지(天地)와 더불어 참여한다는 것은 천지(天地)와 더불어 함께 서서 셋이 됨을 이른다. 이는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자의 일이다.


중용 제23장(第二十三章)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그 다음은 한쪽을 지극히 함이니, 한쪽을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다.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變)하고, 변(變)하면 화(化)할 수 있으니,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化)할 수 있다.


其次는 通大賢以下凡誠有未至者而言也라 致는 推致也요 曲은 一偏也라 形者는 積中而發外요 著則又加顯矣요 明則又有光輝發越之誠也라 動者는 誠能動物이요 變者는 物從而變이요 化則有不知其所以然者라 蓋人之性이 無不同이나 而氣則有異라 故로 惟聖人이 能擧其性之全體而盡之요 其次則必自其善端發見之偏而悉推致之하여 以各造其極也라 曲無不致면 則德無不實하여 而形著動變之功이 自不能已니 積而至於能化하면 則其至誠之妙가 亦不異於聖人矣리라


그 다음이란 대현(大賢) 이하로 무릇 성실함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는 모든 자를 통틀어 말한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지극히 함이요, 곡(曲)은 한쪽이다. 형(形)은 속에 쌓여 밖에 나타남이요, 저(著)는 또 더 드러남이요, 명(明)은 또 광휘의 발월(發越)[발산(發散)]함의 성(盛)함이 있는 것이다. 동(動)은 성실함이 능히 남을 감동시킴이요, 변(變)은 남이 따라 변하는 것이요, 화(化)는 그 소이연(所以然)을 모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성(性)은 같지 않음이 없으나 기(氣)는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성인(聖人)만이 그 성(性)의 전체(全體)를 들어 다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반드시 선(善)한 단서가 발현(發見)되는 한쪽으로부터 모두 미루어 지극히 하여 각각 그 지극함에 나아가는 것이다. 한쪽으로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으면 덕(德)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어 형(形)·저(著)·동(動)·변(變)의 공효(功效)가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쌓여 능히 화(化)함에 이르면, 지성(至誠)의 묘(妙)함이 또한 성인(聖人)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4년 11월 11일 화요일

2015년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창업대학원 입시홍보

2014년 6월 2일 월요일

[독서토론] 2014.6. 모든 비즈니스는 브랜딩이다

2014년 6월 독서토론
  • 서명: 모든 비즈니스는 브랜딩이다
  • 저자: 홍성태(한양대학교 교수)
  • 일시: 2014.6.30(월) 오전 10시
  • 장소: 경남과학기술대학교 100주년기념관 11층 창업비즈니스센터


2014년 5월 9일 금요일

독서토론. 2014.5.21. 메이커스

제조업과 정보통신의 만남. 그 중심에는 3D프린터가 있다. 그 생생한이야기...

2014년 5월 7일 수요일

스토리텔링과 비즈니스모델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의 중요성이 강조되다 보니, 광고나 기사에서도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심지어는 비즈니스모델을 소개하는 사업설명회에서도 감성이 담긴 스토리를 넣으라는 창업 전문가들의 지적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비즈니스모델은 감성으로만 해서는 사상누각을 지을 수 있다.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할 때는 최고의 감성(emotion)이 담긴 스토리로 구성하여 듣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야겠지만, 이에 대한 근거를 설명할때는 철저히 냉철한 논리가 동원되어야한다.

비즈니스모델 캔버스(Business Model Canvas)를 활용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논리와 감성이 적절하게 버무린 최고의 작품이 비즈니스모델 캔버스이어야 한다.

따라서 캔버스를 이용해 사업설명회가 있을때는 항상 감동이 있어야 한다. 
즉,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런데 철저히 계산된 이야기여야 한다

2014년 5월 6일 화요일

가만히 있으라

요즘 세월호 이후 학교는 '가만히 있다'. 모든 행사는 취소 또는 연기되고, 때가 때인 만큼 학생들은 자중하며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강화되고 있다.

죽음으로 모는 어른의 명령에도 거부할줄 모르고 가만히 있었던 청소년들... 시대(time, 세월)가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도 거부할줄 몰랐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닌 거부한다'던 김예슬양의 선언이 잊혀진지 이미 오래전이다.

큰 가르침이 있어야할 대학은 오직 한가지 지표. 취업률만 최고의 가치로 남아있는 현실. 무엇이 진리고 정의라는 가르치는 것은 이미 사치일뿐이다. 

나 스스로 묻는다. 내 자녀에게 성공을 빌미로 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나... 학생들에게 취업을 빌미로 복종을 강요하지는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