惟天下至誠이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이면 則能盡人之性이요 能盡人之性이면 則能盡物之性이요 能盡物之性이면 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요 可以贊天地之化育이면 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그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그 성(性)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성(性)을 다할 것이요, 사람의 성(性)을 다하면 능히 물건의 성(性)을 다할 것이요, 물건의 성(性)을 다하면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울 것이요, 천지(天地)의 화육(化育)을 도우면 천지(天地)와 더불어 참여(參與)하게 될 것이다.
天下至誠은 謂聖人之德之實이 天下莫能加也라 盡其性者는 德無不實이라 故로 無人欲之私하여 而天命之在我者를 察之由之하여 巨細精粗가 無毫髮之不盡也라 人物之性이 亦我之性이로되 但以所賦形氣不同而有異耳라 能盡之者는 謂知之無不明而處之無不當也라 贊은 猶助也라 與天地參은 謂與天地竝立而爲三也라 此는 自誠而明者之事也라
천하(天下)의 지성(至誠)은 성인(聖人)의 덕(德)의 성실함이 천하에 더할 수 없음을 이른다. 그 성(性)을 다한다는 것은 덕(德)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인욕(人慾)의 사사로움이 없어 자신에게 있는 천명(天命)을 살피고 행하여 크고 작음과 정(精)하고 거침이 털끝만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과 물건의 성(性)이 또한 나의 성(性)인데, 다만 부여받은 바의 형기(形氣)가 같지 않기 때문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능히 다한다는 것은 앎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함이 마땅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찬(贊)은 조(助)와 같다. 천지(天地)와 더불어 참여한다는 것은 천지(天地)와 더불어 함께 서서 셋이 됨을 이른다. 이는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자의 일이다.
중용 제23장(第二十三章)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그 다음은 한쪽을 지극히 함이니, 한쪽을 지극히 하면 능히 성실할 수 있다. 성실하면 나타나고, 나타나면 더욱 드러나고, 더욱 드러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감동시키고, 감동시키면 변(變)하고, 변(變)하면 화(化)할 수 있으니,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분이어야 능히 화(化)할 수 있다.
其次는 通大賢以下凡誠有未至者而言也라 致는 推致也요 曲은 一偏也라 形者는 積中而發外요 著則又加顯矣요 明則又有光輝發越之誠也라 動者는 誠能動物이요 變者는 物從而變이요 化則有不知其所以然者라 蓋人之性이 無不同이나 而氣則有異라 故로 惟聖人이 能擧其性之全體而盡之요 其次則必自其善端發見之偏而悉推致之하여 以各造其極也라 曲無不致면 則德無不實하여 而形著動變之功이 自不能已니 積而至於能化하면 則其至誠之妙가 亦不異於聖人矣리라
그 다음이란 대현(大賢) 이하로 무릇 성실함에 지극하지 못함이 있는 모든 자를 통틀어 말한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지극히 함이요, 곡(曲)은 한쪽이다. 형(形)은 속에 쌓여 밖에 나타남이요, 저(著)는 또 더 드러남이요, 명(明)은 또 광휘의 발월(發越)[발산(發散)]함의 성(盛)함이 있는 것이다. 동(動)은 성실함이 능히 남을 감동시킴이요, 변(變)은 남이 따라 변하는 것이요, 화(化)는 그 소이연(所以然)을 모름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성(性)은 같지 않음이 없으나 기(氣)는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오직 성인(聖人)만이 그 성(性)의 전체(全體)를 들어 다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반드시 선(善)한 단서가 발현(發見)되는 한쪽으로부터 모두 미루어 지극히 하여 각각 그 지극함에 나아가는 것이다. 한쪽으로 지극히 하지 않음이 없으면 덕(德)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어 형(形)·저(著)·동(動)·변(變)의 공효(功效)가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쌓여 능히 화(化)함에 이르면, 지성(至誠)의 묘(妙)함이 또한 성인(聖人)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